
1998년 초판된 정호승 시인의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가 2021년 8월에 개정증보판으로 다시 나왔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시인이다.
사람의 가슴 속에는 누구나 다 시가 들어있다.
그 시를 내가 대신해서 한 권의 시집으로 묶었다.
당신이 가난한 마음에 이 시집들의 시들이
맑은 물결이 되어 흘러가기를......"
1998년 6월, 정호승
3부 끝 무렵에 실려있는 시를 함께 감상해보자.
아버지들
아버지는 석 달치 사글세가 밀린 지하셋방이다
너희들은 햇볕이 잘 드는 전세집을 얻어 떠나라
아버지는 아침 출근길 보도 위에 누가 버린 낡은 신발 한 짝이다
너희들은 새구두를 사 신고 언제든지 길을 떠나라
아버지는 페인트칠할 때 쓰던 낡은 때묻은 목장갑이다
몇 번 빨다가 잃어버리면 아예 찾을 생각을 하지 말아라
아버지는 포장마차 우동 그릇 옆에 놓인 빈 소주병이다
너희들은 빈 소주병처럼 술집을 나와 쓰러지는 일이 없도록 하라
아버지는 다시 겨울이 와서 꺼내 입은 외투 속에
언제 넣어두었는지 모르는 동전 몇 닢이다
너희들은 그 동전마저도 가져가 컵라면이라도 사먹어라
아버지는 벽에 걸려 있다가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진 고장난 벽시계다
너희들은 인생의 시계를 더이상 고장내지 말아라
아버지는 동시상영하는 삼류극장의 낡은 의자다
젊은 애인들이 나누어 씹다가 그 의자에 붙여놓은 추잉껌이다
너희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깨끗한 의자가 되어주어라
아버지는 도시 인근 야산의 고사목이다
봄이 오지 않으면 나를 베어 화톳불을 지펴서 몸을 녹여라
아버지는 길바닥에 버려진
붉은 단팥이 터져나온 붕어빵의 눈물이다
너희들은 눈물의 고마움에 대하여 고마워할 줄 알아라
아버지는 지하철을 떠도는 먼지다
이 열차의 종착역이다
너희들은 너희들의 짐을 챙겨 너희들의 집으로 가라
아버지는 이제 약속할 수 없는 약속이다
이 시는 세상에 온기를 전하는 작가 고수리의 에세시집 '우리는 이렇게 사랑하고야 만다'에서 인용되기도 했다.




